레트로 시대를 관통하는 뉴트롯 열풍

1930년대 한국 주류 음악으로 성장, 1970년대 남진·나훈아 라이벌 구도… 최고의 인기로 트로트 위력 드러내, 최근 ‘미스트롯’ ‘미스터트롯’ 화제

레트로 시대를 관통하는 뉴트롯 열풍

중·장년층 전유물 넘어 국민 장르로

요즘 대중가요 무대의 대세는 단연 ‘트로트’입니다. 지난 12일 방송된 TV조선의 남성 트로트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의 결승전 시청률은 35.7%로 종합편성채널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작년 상반기에 방송된 여성 트로트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에 이어 ‘미스터트롯’까지 연거푸 성공을 거두면서 트로트가 ‘국민 장르’로 자리 잡는 모양새입니다. 본래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지요. 과연 트로트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1930년대 주류 음악으로 자리 잡은 트로트

트로트(trot)는 4분의 4박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 대중가요의 한 장르입니다. trot는 영어로 ‘빠르게 걷다’ ‘바쁜 걸음으로 뛰다’ 등을 뜻하는 단어예요. 말[馬]의 네 가지 주법인 평보(walk), 속보(trot), 구보(canter), 습보(gallop)에서 따온 것입니다.

트로트라는 이름은 20세기 초 유행한 미국 사교댄스의 연주 리듬을 일컫는 ‘폭스-트로트’에서 따왔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고유 민속 음악에 폭스-트로트를 접목한 ‘엔카’가 유행했고, 이후 한국 대중가요 역시 이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하지만 트로트의 기원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해요. 일부에선 트로트를 식민지 시대에 비탄 정서를 노린 일본이 퍼뜨린 것이며, 당연히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왜색’ 시비가 일고, ‘뽕짝’이란 비하적 표현도 생겨난 것이지요. 반면 엔카의 원류는 도리어 한국이며, 특히 영남 쪽 민요에 기원을 두고 있고, 따라서 트로트는 한국 자체의 발전이라는 반론도 존재합니다.

1920년대에도 트로트가 존재했지만, 트로트가 국내 무대에서 주류로 자리매김한 것은 1930년대 이후입니다.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 ‘애수의 소야곡’의 남인수, ‘타향살이’의 고복수 등이 인기를 끌면서 전통 민요와 대비되는 대중가요의 시작을 알렸고, 해방 후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의 맹활약으로 트로트가 주류 음악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정통 트로트는 형식적으로 ‘레’와 ‘솔’이 빠진 ‘라시도미파’라는 독특한 단조 5음계를 사용합니다. 엔카 역시 이 5음계를 사용합니다. 이 때문에 특유의 비애가 느껴지며, 느리고 서정적인 사랑 노래를 아우르는 ‘발라드’ 등 다른 장르와 차별화됩니다. 발라드(Ballade)는 영국의 무도곡을 가리키던 단어로, 훗날 로맨틱한 가사의 민요를 통칭하게 됐죠. 트로트는 정형화된 리듬에 강약 박자를 가미하고, ‘꺾기’ 등 고유한 창법이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1960~1970년대 스타 출현으로 전성기

트로트가 하나의 장르로서 견고한 위상을 구축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엘러지(elegy·애도하는 노래)의 여왕’으로 통한 이미자의 활약이 절대적이었지요. 그는 1964년 대표곡 ‘동백아가씨’로 앨범 10만장 이상을 판매합니다. 당시 음악 시장 규모를 고려하면, 요즘 100만장을 판매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미자의 성공은 음악이 하나의 산업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어요. 시대적으로도 그의 노래는 경제 개발 시대의 가부장제에 묶인 한(恨)의 여인들을 위로해주었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1930년대 이후 주류 장르로 자리매김한 트로트는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남진(왼쪽)과 나훈아라는 두 스타 가수의 라이벌 구도가 인기를 견인했어요(왼쪽 사진). 오른쪽은 최근 높은 인기를 얻은 트로트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의 결승전 한 장면입니다. 방송의 인기가 보여주듯, 여전히 트로트는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1930년대 이후 주류 장르로 자리매김한 트로트는 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립니다. 남진(왼쪽)과 나훈아라는 두 스타 가수의 라이벌 구도가 인기를 견인했어요(왼쪽 사진). 오른쪽은 최근 높은 인기를 얻은 트로트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트롯’의 결승전 한 장면입니다. 방송의 인기가 보여주듯, 여전히 트로트는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캡처·TV 조선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등장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로 트로트의 위력은 정점에 이릅니다. 남진은 1967년 ‘가슴 아프게’로, 나훈아는 1969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엄청난 인기를 거두게 됩니다. 둘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남진파’와 ‘나훈아파’로 갈릴 정도였죠. 음악 연구자들은 이때를 한국 트로트의 최고이자 마지막 전성기로 봅니다.

새로운 장르의 유행에도 생명력 유지

1970년대에 들면서 록과 포크 등이 젊은 층에서 인기를 끌면서 트로트는 급속히 위축됩니다. 하지만 트로트의 생명력은 여전히 유지됐어요. 록을 하는 조용필도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트로트를 동원해 성공을 거둡니다. 그는 이미 가왕 타이틀을 획득한 1985년에도 3박자 트로트 ‘허공’을 불러 트로트 소생에 기틀을 제공합니다. 1980년대 후반에 와서 ‘신사동 그 사람’ 주현미와 ‘봉선화연정’ 현철이 가수왕상을 거푸 받으면서 트로트는 부활의 날갯짓을 합니다.

1990년대에는 현철·태진아·송대관·설운도의 4강 체제가 구축되었지만, 너무 오래가는 바람에 신인들의 등장이 더뎌졌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장윤정의 ‘어머나’가 성공을 거두면서 또 한 번 판을 바꿉니다. 아이돌 그룹인 슈퍼주니어가 ‘로꾸거’, 빅뱅 출신 대성이 ‘날 봐 귀순’을 발표해 트로트의 잠재력을 타진합니다.

물론 이 흐름이 오래가지 못했지만 트로트는 영원, 불사(不死)의 존재임을 일깨웠습니다. 최근 사례가 보여주듯, 언제든 기회가 있으면 트로트는 다시 대중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사람들 마음 저 아래로 파고드는 트로트만의 흡수력은 어떤 음악도 따르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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