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수의 심리학

펭수의 심리학

즈믄해 2019년부터 이어져 온 펭수의 열일이 새해에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게걸스럽게 펭수를 소비하는 중이다. 가히 열풍이다. 광고계와 출판계의 블루칩에 가뿐히 등극했으며 공중파 방송과 이목이 필요한 관공서와 지자체의 러브콜도 끊임없이 받는 중이다. 펭수의 인기를 분석하는 사람들의 직업 또한 심리학자부터 증권가의 애널리스트까지 다양하다.

너도나도 죄다 아는 거짓말. 펭수는 펭귄이 아니다. 남극에서 빙하 타고 왔을 리도 없고, 스위스에 들러 요들송을 배웠을 리도 만무하다. 그저 거대 가면(?)을 쓴 EBS의 홍보를 위한 캐릭터이며 그 안에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남자가 열 살 어린아이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다.

그의 가면은 확실히 우리들이 매일같이 쓰고 다니는, 그것들과는 다르다.

우리들의 가면 혹은 페르소나(Persona)는 ‘나’를 기만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나’를 세계 속에, 바로 여기 사람들 속에 ‘현존재’로 인정받게 해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세계와의 연결고리이자 일종의 ‘심리적 와이파이’이다. 와이파이들은 곳곳에 편재하므로, 지뢰처럼 깔려있으므로, 내가 가면처럼 쓰고 있는 수많은 페르소나는 ‘나’를 세계라는 무거운 바닥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발붙이게 해주는 중력과도 같다고 할까.

벗지 못한 채, 걸어나가지 못한 미지의 땅을 깨금발로 훔쳐보며, 가면 뒤 날 것의 욕망들은 불순하게 날뛰다 들끓기 시작한다. 남들의 비극에라도 한마디 하지 않으면 나의 무료함과 그 속에 깃든 박하지만 실한 극들이 조용히 밤마다 찾아들어 심란하게 하는 것, 그것이 도시와 자본주의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들의 찌질한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연대보다 질투가, 집단지성보다 집단왕따가 너와 나의 힘이 되어버렸다니, 오호통재라…

하지만 누군가의 비극을 내밀하게 바랐을지라도, 상상이 아닌 처절한 현실이 된 개인의 비극은 가끔 우리들의 선함을 일깨우기도 하는 것일까?

젊디젊은 연예인들이 미련 없이 단념한 생들의 편린들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깃발이 창궐하는 2020년의 거리 귀퉁이에서, 일베 파시즘에 경도된 철없는 아이들이 내뱉는 불안한 토사물 속에서, 이제 ‘소악행’은 거두고, 무료하고 소박한 비극의 투사는 내게로 다시 거두어 들이고 싶어졌다. 그래,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결연하게 한걸음 내딛기 전, 잠깐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리고,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마지막으로 그 해치지 않을 솔직한 욕망의 배설물들을 진지충이나 꼰대가 아닌 거리의 말들로 훈계해줄 2020년의 힙한 ‘짜라투스트라’가 결단코 필요하다.

가볍지만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내뱉어주고 함께 희화화해줄 발화체, 가면을 쓴 대변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필코 성숙해지고 말테니, 한 번만이라도, 나도 그렇게까지 나쁜 년놈이 아닐 수도 있다고 확인받고, 정죄되고 싶다. 가면이 없던 열 살쯤의 그를 통해서,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지 않았던 그를 통해, 결국 함께 건너오지 못한 나 자신의 순수함이라고 믿고 싶은, 가면 뒤에 숨어서일지언정, 가면마저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는 그를 통해.

열 살의 욕망은 공격당하지 않으며, 열 살의 욕망은 투사되지도 않으며, 열 살의 욕망은 왜곡되지도 않을 터이다. 거기다, 인간이 아닌 펭귄이라니?

펭수야, 그리하여 너는 탄생했고, 우리는 너를 아프게 앓다가 낳았고, 우리는 너에게 자이언트 가면을 씌웠고, 그리하여 우리의 씻김굿은 함께 한동안 이루어질 것 같다. 맘껏 가볍게 우리들의 욕망과 악행들을 까발려주기를. 이 열풍이 지난간 후, 우리가 가면 밖으로 1밀리그램해 2019년부터 이어져 온 펭수의 열일이 새해에도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게걸스럽게 펭수를 소비하는 중이다. 가히 열풍이다. 광고계와 출판계의 블루칩에 가뿐히 등극했으며 공중파 방송과 이목이 필요한 관공서와 지자체의 러브콜도 끊임없이 받는 중이다. 펭수의 인기를 분석하는 사람들의 직업 또한 심리학자부터 증권가의 애널리스트까지 다양하다.

너도나도 죄다 아는 거짓말. 펭수는 펭귄이 아니다. 남극에서 빙하 타고 왔을 리도 없고, 스위스에 들러 요들송을 배웠을 리도 만무하다. 그저 거대 가면(?)을 쓴 EBS의 홍보를 위한 캐릭터이며 그 안에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남자가 열 살 어린아이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고 있다.

그의 가면은 확실히 우리들이 매일같이 쓰고 다니는, 그것들과는 다르다.

우리들의 가면 혹은 페르소나(Persona)는 ‘나’를 기만하는 장치임과 동시에 ‘나’를 세계 속에, 바로 여기 사람들 속에 ‘현존재’로 인정받게 해주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세계와의 연결고리이자 일종의 ‘심리적 와이파이’이다. 와이파이들은 곳곳에 편재하므로, 지뢰처럼 깔려있으므로, 내가 가면처럼 쓰고 있는 수많은 페르소나는 ‘나’를 세계라는 무거운 바닥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발붙이게 해주는 중력과도 같다고 할까.

벗지 못한 채, 걸어나가지 못한 미지의 땅을 깨금발로 훔쳐보며, 가면 뒤 날 것의 욕망들은 불순하게 날뛰다 들끓기 시작한다. 남들의 비극에라도 한마디 하지 않으면 나의 무료함과 그 속에 깃든 소박하지만 확실한 비극들이 조용히 밤마다 찾아들어 심란하게 하는 것, 그것이 도시와 자본주의에 발붙이고 사는 우리들의 찌질한 진짜 모습일지도 모른다. 연대보다 질투가, 집단지성보다 집단왕따가 너와 나의 힘이 되어버렸다니, 오호통재라…

하지만 누군가의 비극을 내밀하게 바랐을지라도, 상상이 아닌 처절한 현실이 된 개인의 비극은 가끔 우리들의 선함을 일깨우기도 하는 것일까?

젊디젊은 연예인들이 미련 없이 단념한 생들의 편린들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의 깃발이 창궐하는 2020년의 거리 귀퉁이에서, 일베 파시즘에 경도된 철없는 아이들이 내뱉는 불안한 토사물 속에서, 이제 ‘소악행’은 거두고, 무료하고 소박한 비극의 투사는 내게로 다시 거두어 들이고 싶어졌다. 그래,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결연하게 한걸음 내딛기 전, 잠깐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싶다. 그리고, 들여다보고 인정하고 마지막으로 그 해치지 않을 솔직한 욕망의 배설물들을 진지충이나 꼰대가 아닌 거리의 말들로 훈계해줄 2020년의 힙한 ‘짜라투스트라’가 결단코 필요하다.

가볍지만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내뱉어주고 함께 희화화해줄 발화체, 가면을 쓴 대변인이 필요하다. 우리는 기필코 성숙해지고 말테니, 한 번만이라도, 나도 그렇게까지 나쁜 년놈이 아닐 수도 있다고 확인받고, 정죄되고 싶다. 가면이 없던 열 살쯤의 그를 통해서,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지 않았던 그를 통해, 결국 함께 건너오지 못한 나 자신의 순수함이라고 믿고 싶은, 가면 뒤에 숨어서일지언정, 가면마저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오작동을 일으키지 않는 그를 통해.

열 살의 욕망은 공격당하지 않으며, 열 살의 욕망은 투사되지도 않으며, 열 살의 욕망은 왜곡되지도 않을 터이다. 거기다, 인간이 아닌 펭귄이라니?

펭수야, 그리하여 너는 탄생했고, 우리는 너를 아프게 앓다가 낳았고, 우리는 너에게 자이언트 가면을 씌웠고, 그리하여 우리의 씻김굿은 함께 한동안 이루어질 것 같다. 맘껏 가볍게 우리들의 욕망과 악행들을 까발려주기를. 그리하여 이 열풍이 지난간 후, 우리가 가면 밖으로 1밀리미터라도 나아갔기를, 지상의 중력을 이기고 1밀리그램이라도 가벼워졌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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